자유 게시판
속칭 재패니메이션이라 불리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일본 내에서 매년 수백, 수천종이 쏟아져 나오며 영화보다도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며, 역시 년간 수천, 수만 종이 쏟아져 나오는 게임은 일본 내에서만 그치지 않고 -닌텐도 DS나 플레이스테이션 같은 게임기와 더불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일본의 대중문화(만화, 애니, 게임)의 이면에는 물론 다양한 만화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그리고 게임 제작자들이 있다는 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는 일본을 벗어나 세계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멀티플 제작자'들. 그리고 그들 중에 역시 세계를 무대로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스타 작가가 있으니...
재패니메이션 성공 전설, 토리야마 아키라(鳥山明)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이름은 모르더라도 그의 대표작을 모르는 이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1984년부터 1995년까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하고, 1986년부터 1997년까지 TV (그리고 동시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인 작품 <드래곤볼(Dragon Ball)>은 장기간에 걸쳐 잡지의 인기 1위를 고수하며 90년대 점프 황금 시대를 이끄는 견인차 구실을 했으며, 일본 내에서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 수십 개 나라에 선보이며 ‘재패니메이션’의 국제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소년 점프의 600만부 쾌거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파격적인 파워가 있었기에 실현될 수 있었다.” 당시 편집장 니시무라 시게오)
일본 내에서만 2억 부 가까이 판매하여 사실상 판매율 1위를 자랑하는 이 작품 덕분에 작가인 토리야마 아키라는 일본 내에서도 손꼽는 갑부가 되었고, 2000년에는 수청 소득 8억 엔(약 80억 원)에 가까운 소득으로 전국에서도 76위에 이르는 엄청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현재는 때때로 단편 등 짧은 작품만을 그리고 있지만, 기존 작품의 저작권만으로도 수입 상위권을 유지하고 있다.)
[ 드래곤퀘스트 8편. 영화풍의 파이널 판타지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지만 매우 자연스럽다. ]
게다가, 그가 디자인을 맡은 게임 <드래곤 퀘스트(Dragon Quest)>는 1편 이래 시리즈를 모두 합쳐 4,600만 개가 판매되었고, 트레이딩 카드를 필두로 다양한 캐릭터 상품을 쏟아내며 인기를 끌고 있다.
<드래곤볼>의 연재가 끝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연재와 방송이 계속되고 있으며, 당시 2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애니메이션은 2008년 현재도 ‘지금까지 가장 재미있었던 애니메이션’의 종합 1위(남녀 모두 1위)를 기록하며 그 인기가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으며,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의 만화 부분에서 3위를 기록하는 등 예술적인 가치조차 인정받았다.
[ 애니메이션으로도 선보인 블루 드래곤. 물론, 토리야마씨의 깔끔한 그림체가 돋보인다.]
만화가/원화가로서 그의 실력은 화<드래곤 퀘스트> 시리즈의 라이벌인 <파이널 판타지>를 낳은 사카구치 히로노부(坂口博信)씨가 자신의 게임 <블루 드래곤(BLUE DRAGON)>의 원화가로 초빙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일본 내에서 ‘가장 그림을 잘 그린 만화가’로 선출되기도 했다.
고난의 데뷔 시절
앞서 살펴보았듯, 토리야마 아키라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최고의 만화가라 부를 수 있다. 그의 작품 중 잘 알려진 것은 <드래곤볼>과 <닥터 슬럼프> 정도지만, 그의 그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 그가 디자인한 자동차는 실제로 생산되어 판매하고 있다. ]
애니메이션과 일러스트로 과장된 연출이 눈에 띄는 일본 만화계만이 아니라 프랑스를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인정받는 만화가. ‘재패니메이션’을 대표하는 작가라면 그 누구 할 것 없이 이 사람을 뽑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가...
하지만, 어릴 때부터 -가난한 가정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만화 그리기에 열중했던 그의 만화 생활은 그다지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저녁밥을 먹을 밥이 없어 대신 왈츠(?)를 추곤 했다는 부모 밑에서 자라난 그는, 오직 그림 그리는 일을 유일한 취미이자 즐거움으로 삼아 노력했지만, 고등학교 디자인과를 졸업하고 들어간 회사 생활은 그의 취미에 맞지 않아 금방 퇴직했고, 결국 어려운 생활 속에 상금에 관심을 갖고(눈이 멀어) ‘주간 소년 매거진’의 신인상에 응모하려 했지만 마감에 맞추지 못하여 포기. 결국 조금이라도 돈이 되길 바라며 ‘주간 소년 점프’의 문을 두드렸다.
이제까지 이 코너에서 소개한 ‘타카하시 루미코’ 등 만화가들이 모두 신인상을 거쳐 데뷔한 것과는 달리 당시의 그는 ‘상’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을 뿐만 아니라, ‘데뷔’조차 쉽지 않았다.
[ 그의 초기작 중 하나인 <POLA&ROID> 이렇게 그는 처음부터 미국 스타일을 모방하곤 했다. ]
SF, 특히 외국의 SF를 좋아해서 <스타워즈>의 패러디 같은 작품을 그리고, 효과음조차 일본어가 아닌 알파벳으로 그리곤 했던 그의 작품은 당시 일본 독자들에게 그다지 명쾌하게 다가오지 못했고, 한마디로 재미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서 남다른 감각을 느낀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당시 점프 편집자 중 하나였던 닥터 마시리트(아니, 토리시마 카즈히코)였다.
[ <닥터 슬럼프>의 악의 과학자 마시리트. 바로 토리시마씨를 모델로 하고 있다. ]
[ <타이의 대모험>에서 작가의 분신이기도 한 포프의 스승으로 등장한 마시리트. 괴짜 같지만 엄격하면서 유능한 스승으로 등장하는 그 역시 토리시마씨를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
평범한 필자에 지나지 않았던 호리이 유지를 게임 업계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전영소녀>의 카츠라 마사카즈 등 작가들을 발굴, 육성하고 <유희왕> 등의 미디어 믹스 산업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만화와 관련된 산업 발전에 이바지한 그는, 귀신 편집자라는 별명 그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가차없이 잘라버리는 걸로 유명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재능’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갖고 있었다.
(그의 밑에서 활동한 많은 작가들이 그를 패러디한 캐릭터를 선보인 것으로 잘 알려진 토리시마씨는, <드래곤볼>을 시작으로 현재(<원피스>, <나루토> 등)에 이르는 점프의 성공 신화를 낳은 주역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그의 활약으로 주간 소년 점프는 소년지 인기 1위를 획득했
을 뿐만 아니라 애니, 게임 등 미디어 믹스에서도 꾸준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현재 슈에이사의 이사를 맡고 있다. 편집자 시절의 그와 관련하여 수많은 전설이 있는데, 최근 오바타 타케시시의 만화 <바쿠만>에서 소개된 '원고를 제단기에 넣어버린 편집자 얘기'가 바로 그와 토리야마의 이야기이다.)
[ 데뷔작 원더아일랜드. 뭔가 복잡하고 어수선한 작품으로 인기도 최악이었다. ]
러브 코미디를 지나치게 좋아한다는 단점은 있지만, 엄격하면서도 적절한 조언으로 잘 알려진 그는 토리야마에게 “지금은 부족하지만 노력하면 뭔가 될 것이다.”라며 격려를 계속하였고, 그에 호응하듯 토리야마 역시 그 밑에서 계속 수행하며 결국 1978년 단편 <원더 아일랜드>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데뷔 전까지 토리야마 아키라가 토리시마로부터 ‘퇴짜’ 맞은 원고는 1년간 500페이지에 달하는데, 이는 그의 끈기와 노력을 입증하는 동시에 일단 인정한 작가는 끝까지 밀어주는(수십 편의 원고를 퇴짜 놓으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토리시마의 스타일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조국으로 돌아가려는 일본군 조종사가 이상한 섬에서 겪는 일을 담은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불가사의’하고 황당한 내용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의문사)를 토해내게 했고 결국 ‘인기 최하위’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작품에 이어 <원더 아일랜드 2> 등이 수록되긴 했지만 역시 인기는 별로… 데뷔를 했다곤 하지만, 1년 간 500페이지 가까운 ‘퇴짜’가 계속되면서도 꾸준히 작품을 그리던 그에게 토리시마가 조언을 했으니 바로 ‘주인공을 여자’로 하자는 것이었다.
[ 토리야마 최초의 인기(?)작, <소녀 형사 토마토> ]
그것은 그때까지 아저씨 캐릭터를 중심으로 그렸던 토리야마 아키라에게 있어 파격적인 의견이었지만, 그 결과 탄생한 <소녀 형사 토마토>가 그나마 인기를 끌면서 그에게 ‘연재’라는 기회가 찾아왔다.
닥터 슬럼프, 그리고 인기 작가로의 출발
이제껏 짧은 단편 밖엔 그리지 않았던 그에게 갑자기 찾아온 연재 기회. 그간 수백장의 원고를 ‘퇴짜’ 맞은 그로서는 다시 없는 기회인 만큼 갖은 고민을 계속하기에 이른다. SF를 좋아하여 다양한 소재를 모으고 있던 그는 <도라에몽>처럼 발명품이 계속 등장하는 ‘박사물’을 구상했는데, 박사가 만드는 로봇이 등장하는 시점에서 역시 고민에 빠진 것이다.
처음에는 로봇을 크게 그렸다가 페이지를 많이 차지하고 귀찮다(!)는 이유로 작게 만들었더니 볼품이 없어지고, 이런 저런 고민 속에 토리시마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여자애가 좋아.”
여자, 그것도 애를 그리는 데는 그다지 자신이 없는 그이지만(어릴 때부터 SF 그림을 많이 그리고, 디자인 학과를 나왔기 때문인지 그는 사람보다는 메카, 괴수 등을 더 잘 그린다.) 편집자, 그것도 ‘귀신 편집장’ 토리시마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는 법.
]
[ 아라레. 작품의 주역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다. ]
그리하여 일본의 수많은 캐릭터 중에서도 이색적인 소녀 로봇, 아라레가 탄생한 것이다.
로봇 주제에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고, 나날이 키가 작아지는가 하면 그야말로 사람의 어린애보다도 더 어린애 같은 행동으로 일관하는 캐릭터. 주특기 지구 쪼개기로 막강한 파워를 자랑하지만 길거리에 떨어진 X를 나뭇가지에 꽂아 들고 ‘쌩~’하는 소리를 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그야말로 가만히 있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 캐릭터의 등장으로 작품의 주역은 ‘박사’인 센베로부터 그녀에게 넘어갔고, 이후 모든 이야기는 그녀를 중심으로 펼쳐지게 된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5년에 걸쳐 총 18권으로 완결된 이 작품은, 제 27회 소학관 만화상을 수상하는 등 높은 평가 속에 인기를 끌었고, 1981년부터 시작된 TV 애니메이션은 –소년 잡지 연재작임에도- 남녀노소(그야말로 유치원생부터 성인까지)를 가리지 않는 엄청난 인기(최고 시청률 36.9%. 역대 애니메이션 시청률 순위 3위)를 누리며 토리야마 아키라를 인기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 애독자상에 선정되어 45페이지 단편으로 완성한 <POLA&ROID>. 인기 작가의 대열에 들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증거였다. ]
이 작품은 <드래곤볼>이 끝난 1997년 다시 애니메이션화되었고 해외에도 널리 소개되어 호평을 받았다.
호리이 유지와 토리야마 아키라. 두 거장의 만남
[ 초 인기작 드래곤 퀘스트의 참여는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주었다. ]
<닥터 슬럼프>의 성공은 그에게 또 다른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바로 호리이 유지와 함께 <드래곤퀘스트(이하 드퀘)>의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호리이 유지의 <포트피아 연속 살인 사건>으로 게임 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를 연결시켜 준 것은, 한편으로 호리이 유지가 게임 업계에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던 토리시마.
당시 일본 최초의 RPG 작품을 제작하면서 캐릭터 디자인을 맡을 사람을 찾고 있던 호리이는 그와 인연이 깊은 토리시마에게 상담을 했는데, 여기서 토리시마가 토리야마 아키라를 추천하면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TRPG와 미국식 RPG를 좋아하고 판타지에 빠져있던 호리이 유지의 러프 스케치를 바탕으로 토리야마 아키라가 몬스터 디자인 등을 맡는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뛰어난 감각을 가진 편집자 토리시마가 추천한 만큼 토리야마 아키라의 실력을 인정한 호리이 유지는 러프 스케치를 보냈고,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바로, 토리야마에 의해 '수정'이 가해진 몬스터들이 당초 제작진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던 것.
이를테면, 본래는 이러한 점액질 생명체여야 할 슬라임이...
이런 형태로 탄생했다.
"눈과 입이 달린 슬라임"이라는 것은 분명 '정통파 RPG'(이를테면 울티마)를 꿈꾸고 있던 호리이 유지의 생각에 들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이런 그림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놀랍게도 그는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토리야마의 ‘변경’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그리하여, 드퀘의 마스코트 캐릭터라 할 수 있는-그리하여 수많은 작품에서 조연으로 활약하고, 캐릭터 상품으로도 인기를 끄는- 드퀘 만의 슬라임이 탄생했다.
TRPG의 슬라임은 지저분하고 징그럽고 무엇보다도 ‘칼’이 통하지 않는 귀찮은 적수지만, 드퀘의 슬라임은 귀엽고 앙증맞은 모습이기에 TRPG의 그것처럼 설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슬라임은 –드퀘를 시작으로 하는 수많은 일본 RPG에서- 최약체 캐릭터이자 때로는 동료나 애완용으로 등장하는 개성을 갖게 되었다.
<드퀘>의 디자인에 있어 변화는 슬라임에 그치지 않았다. 토리야마 아키라가 디자인한 몬스터는 어느 것 하나 가릴 것 없이 기존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심지어 <반지의 제왕>부터 악역으로 알려진 오크마저 완전히 다른 캐릭터가 되면서, 드퀘는 미국 RPG와 비슷하면서도 완전히 다른 게임으로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사랑을 받게 된다.
[ 드퀘의 오크. <반지의 제왕>과는 확연하게 다른 느낌을 준다. ]
더욱이, 무섭다기보다는 귀여운 몬스터. 이제까지의 어떤 게임에서도 생각할 수 없었던 그런 변화는 <드래곤 퀘스트> 만이 아니라 이후 수많은 작품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를 테면, 세계적인 인기를 휩쓸고 있는 <포켓 몬스터> 역시 ‘귀여운 몬스터’라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발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토리야마 아키라가 호리이 유지의 원안대로 몬스터를 디자인했다면, 과연 지금 같은 <드퀘>의 인기를 기대할 수 있었을까? 물론, 나름대로 인기는 끌었겠지만 슬라임 인형 같은 캐릭터 상품은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그리고 <타이의 대모험> 속의 고메 같은 마스코트 캐릭터가 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일본을 대표하는 RPG <드래곤퀘스트>의 인기와 관련하여 그의 이름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 드래곤 퀘스트 8편의 외전인 소년 양가스와 이상한 던젼. 토리야마 아키라씨 특유의 분위기가 잘 살아있다. ]
슈퍼 울트라 작가의 길을 향하여…
한편, <닥터 슬럼프>의 성공은 토리야마 아키라를 일약 초인기 작가로 성장하게 해 주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연재는 그에게 큰 무리를 안겨주었다.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도라에몽>처럼 '특이한 발명품'을 내세워 펼쳐지는 옴니버스 스토리였기에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장기간의 연재에 지친 나머지 후반에는 새로운 발명품보다는 캐릭터 전원이 참여하는 자동차 경주나 -후일 <드래곤볼>에서도 써먹은- 최강 대결, 또는 자주 등장한 발명품 타임머신을 써서 주인공들의 미래 모습을 보여주는 등 반복적인 이야기로 페이지를 채우기도 했다.
[ 작가 자신의 '소재 문제'마저 아이디어로 삼는 장면. 개그컷이지만 당시의 심각한 상황을 입증하는 사례가 아닐까? ]
결국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연재를 마감하고자 했지만, 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이 작품은 -작가 특유의 센스 덕분인지- 다소 늘어지는 상황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잡지사에서 연재 마감을 허락할 리가 없었고, 결국 그는 소재가 떨어진 상황에서도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페이지를 메우며 연재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이르게 되자 토리야마씨는 '바로 다음 연재를 시작하겠다.'라는 말로 편집부를 설득하여 5년 간 계속된 <닥터 슬럼프>를 마감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연재를 시작하려고 보니 아이디어가 금방 쏟아지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과거에 자신이 내놓았던 -그러나 대개 별로 눈길을 끌지 못했던 단편 중에서 아이디어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선택된 것이 단편 중에 그나마 호평 받은 <기룡소년(드래곤 보이)>과 <톰프 대모험> 두 작품에서 '중국풍', '권법 이야기', '모험 여행' 등의 아이디어를 따와 구성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드래곤볼>이었다.
(작품 제목은 이소룡의 영화 <용쟁호투(일본명 '타올라라 드래곤(燃えよドラゴン)')>에서 따왔다고 한다.)
[ 토리야마 아키라 단편집. O작 극장. 여기서 재패니메이션 최고 인기작 <드래곤볼>이 탄생했다. ]
[ 드래곤볼에 영향을 준 두 작품. <기룡소년>과 <톰프의 대모험>. 각 작품 단독으로도 꽤 재미있다. ]
[ 열심히 구상했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인기는 솔직히 말해서 없었다. ]
'서유기'나 '팔견전' 등 여러 작품에서 플롯을 따오고, 여기에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뒤섞어서 탄생한 <드래곤볼>은 나름대로 독특한 아이디어로 눈길을 끌긴 했지만 권법과 개그, 모험 등 어느 쪽도 두드러지지 못하는 애매한 모양으로 완성되어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아니, 인기 순위를 아래에서 세는 게 더 빠를 정도로 확실히 말해 인기가 없었다.)
본래 주간 소년 점프 같은 잡지에서 이처럼 인기가 없다면 대개 도중 하차하게 마련이지만(특히 <드래곤볼>은 일단 드래곤볼을 모아 소원을 빌었다는 '결말'이 나온 만큼 끝내기도 좋았을 것이다.) 그가 데뷔하기 전부터 감각을 인정하고 밀어주었던 편집자 토리시마의 전폭적인 지원(그리고 적절한 조언)으로 작품의 연재는 계속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여하튼 인기가 없으면 안 되는 법. 조금이라도 인기를 높이고자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두 사람은 이윽고 하나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바로, 드래곤볼 시리즈에서는 거의 들러리에 가까웠던 무술 부분을 부각하여 "천하제일 무도회"라는 것을 등장시킨 것이다.
세계 각지의 강자들이 모여 대결을 벌인다는 개념은 지금은 매우 흔하지만 당시로서는 상당히 참신한 소재였고, 이를 중심으로 이제껏 이리저리 우왕좌왕하던 이 작품이 중심을 잡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전개하게 되었다.
'드래곤볼을 둘러싼 모험'은 '천하제일 무도회'를 통해 강해지기를 바라는 '손오공'의 성격을 확고하게 고정시켰고, 레드리본군과의 싸움 등 다양한 이야기를 뒤섞으며 인기를 끌어갔다.
이렇게 시작된 인기 행진은 -당시 점프에 연재되던 <슬램덩크>나 <다이의 대모험> 등과 더불어- 잡지의 황금 시대를 여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수많은 파생 시장을 낳게 되었다.
또 다른 천하제일 무도회를 지나 피콜로 대마왕과의 대결, 그리고 신으로부터 수련을 받은 손오공이 23회 무도회에 출전하여 마쥬니어와 맞서기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숨 가쁘게 달려간 <드래곤볼>은 점프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나갔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을 포함 국제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는 상황에서 대망의 결말을 맞이했다.
어른스럽게 성장한 손오공이 천진반을 확실하게 꺾고 마쥬니어에게 승리하는가 했더니 치치와 결혼하여 하늘높이 날아가 사라지고... 그야말로 '끝'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장면으로 이야기를 마감한 것이다.
[ 드래곤볼 스토리의 결말. 여기서 끝내기를 바란 사람들도 많다. ]
정말로 <드래곤볼>이 여기서 막을 내렸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실제로 작가 역시 여기서 연재를 마감할 예정이었다고 하지만 인기투표에서 다른 작품을 멀찌감치 떼어놓고 앞서가던 이 작품을 이대로 끝내는 것을 편집부는 도저히 용납하지 않았고, 결국 <드래곤볼>은 기존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새롭게 나아갈 수 밖에 없었다.
전편에서 손오공은 천진반에 이어 마쥬니어를 물리치고 지구 최강의 자리에 올랐다. 그렇다면 다음은 자연스럽게 '다른 세계'라는 것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소년 만화의 인플레이션'을 생각하면 더욱 더...)
그리하여 난데없이 손오공의 형이 나오는가 하면, 마쥬니어가 사실은 외계인이었다는게 밝혀지고 손오공의 아들에, 피콜로가 정의의 편이 되어 협력하는 등 사뭇 다른 상황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SF틱하게 '전투력 측정기(스카우터)'라는게 나오기 시작한 시점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가 했더니, 3단 변신하는 보스에 이르면 완전히 RPG의 세계.
토리야마 아키라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은 <드래곤 퀘스트>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할까?
[ 만화 캐릭터는 아니지만, 이런 생각이 절로 나오곤 한다. (고스트스위퍼 / 시이나 다카시) ]
[ 초 사이아인 등장! 하지만 위에는 위가 있다. ]
불과 얼마 전까지 동료로서 싸웠던 이들은 이제 방해 밖엔 안 되는 존재. (아니, 방해나 되면 다행일까?) 전투력 18000의 베지타가 지구를 날려버리겠다고 협박하는 상황에서 대충 따져도 1000만은 넘을 프리저와 손오공이 전력을 다해 싸우는 상황에서 무사한 나메크성은 역시 '신의 고향'답다고 해야 할까?
이렇게 온갖 모순과 의문이 감돌긴 했지만, 상품으로서의 <드래곤볼>이 퇴색되지 않는(아니 더욱 돋보이는) 상황에서 작품의 연재는 계속 될 수 밖에 없었다. (실례로 '나메크별'을 무대로 대결이 벌어질 당시 <드래곤볼>과 관련된 경제 효과는 그 작품 하나 만으로도 거의 '대사업'이라고 할 만 했다. 당시만 해도 1억 부를 가볍게 넘긴 코믹스만이 아니라 평균시청률 20% 이상의 애니메이션, 여기에 게임에 이르기까지... 당시 토리야마 아키라의 평균 수입만 해도 5~6억엔(50~60억원)에 이르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결국 이 작품은 소년지에서는 이례적으로 장장 10년 이상에 걸쳐 연재되어 42권에 달하는 수량으로 선보였고, 그 밖에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지금까지 인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 또 다시 어려진 손오공이 등장하는 <드래곤볼 GT>. 여기서 드래곤볼과 손오공의 이야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
심지어 만화책으로는 1995년에 완결되었지만, 그후 <드래곤볼 GT>라는 이름으로 후속편이 애니메이션으로 선보이기도 했고, 근래에는 한일 합작으로 개발한 <드래곤볼 온라인> 같은 게임들이 계속 제작되고 있으니 <드래곤볼>은 20세기 일본 만화 최고의 상품일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기억되는 작품으로 남을 것 같다.
(작년에도 21세기를 대표하는 인기작인 <원피스>와 함께 특집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져 선보이기도 했다.)
[ 드래곤볼 온라인, 한일 합작 프로젝트로 열심히 진행 중. ]
[ 드래곤볼 영화 프로젝트, 드래곤볼 에볼루션. 주윤발도 등장한다는데 어떨까? 본 이들은 평을 부탁한다. ^^ ]
물론, 그 인기는 일본에서만 그치는 게 아닌 듯 헐리우드에서 실사판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것의 성공 여부에 대해선 여러 이견이 있지만(악평일색이긴 하지만), 나온 지 10년이 넘은 애니메이션, 그것도 영화로 만들기 힘든 격투 작품이 영화로 제작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그리고 <드래곤볼>의 인기를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을 초월하는 기록이 넘쳐나는 일본 만화계에서도 특히 <드래곤볼>의 기록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는데 그중 몇 개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2006년까지 만화책 세계 판매 수량 3억부 돌파
2. 나메크별 편 당시 점프 1000표 앙케이트 중 815표 획득.
3. 극장판 애니메이션 17편 총 관객수 4900만명.
4. 슈퍼패미콤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40개 이상의 게임 발매. (현재도 제작 중)
5. 현재까지 애니메이션 40개국에 방영. (이 중 프랑스에서는 최고 시청률 87.5% 달성. 그 밖에 각종 애니메이션 상 수상.)
6. 2005년 아타리에서 드래곤볼 관련 게임으로 8500만달러 매상. (2003년까지 판매된 관련 게임 27종 도합 1150만개 판매)
7. 2003년 드래곤볼 애니메이션 관련 시장 규모 3000억엔(3조원)
지금도 계속되는 토리야마 아키라의 전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소득자가 많은 일본 만화가 중에서도 특히 높은 수익을 거두고 있는 토리야마 아키라는 일본이라는 특수한 환경이 낳은 최고의 스타 중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스타가 탄생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는 주린 배를 안고 그림을 그리던 소년 시절이 존재하고 있었고, 년간 수 백 장의 원고를 퇴짜맞으면서도 도전을 계속했던 끈기가 존재하고 있다.
그가 성공하기까지 전폭적인 신뢰를 주었던 토리시마 카즈히코의 존재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토리야마 그 자신의 노력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결국 성공은 그 자신에게 달린 것이라 할 것이다.
아니, 단순히 노력과 끈기 만이 아니라 항상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스스로를 갈고 닦는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닥터 슬럼프>를 시작으로 <드래곤볼> 그리고 <드래곤퀘스트>라는 명작의 일러스트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 작가, 토리야마 아키라의 성공담은 멀티플 작가… 창작자로서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느끼게 해 준다.
토리야마 아키라 작품 목록
일본 최고의 만화가이자 ‘가장 그림을 잘 그리는 작가’로 알려진 토리야마 아키라는 자신의 작품 외에도 게임 디자인 등 다양한 작업을 맡아 진행하고, 최근에는 자동차의 디자인도 맡아 진행하고 있다. 여기서는 만화, 게임 작품에만 한정하여 소개한다.
1. 만화
- 닥터 슬럼프 : 총 18권.. 애니메이션화
- 드래곤볼 : 총 42권. 국내 발매. 애니메이션화
- 토리야마 O작 극장 : 단편집. 총 3권. 국내 발매.
- 레이디 레드(LADY RED) : 1987년 슈퍼 점프 연재. 해적판 발매.
- 저금 전사 캐쉬맨(貯金戦士キャッシュマン) : 1권. 국내 발매.
- 고!고! 애크맨(GO!GO!ACKMAN) – 1권. 해적판 발매.
- 우주인 페케(宇宙人ペケ) : 1996년 주간 소년 점프 연재. 2화.
- 토키메챠(TOKIMECHA) : 1997년. 주간 소년 점프 연재. 3화
- 마신촌의 부불(魔神村のBUBUL) : 1997년 주간 소년 점프 연재.
- 하이교의 마히마히(ハイギョのマヒマヒ) : 1999년 주간 소년 점프 연재.
- 효탐(ヒョータム) : 2000년 E 점프 연재.
- 코와(COWA) : 1권. 국내 발매.
- 카지카(カジカ) : 1권.
- 샌드랜드(SAND LAND) : 1권. 국내 발매
- 토치오 엔젤 천사 토치오(TOCCIO THE ANGEL てんしのトッチオ)
- 네코마신 시리즈(ネコマジンシリーズ) : 3권. 네코마신 Z만 국내 출간.
- 크로스 에포크(CROSS EPOCH) : 원피스의 오다 에이치로와의 공동 작품.
2. 게임
- 드래곤 퀘스트 시리즈. : 본편, 외전 등.
- 크로노 트리거(クロノ・トリガー)
- 토발 시리즈(トバル) : 토발 No.1, 토발 2
- 블루 드래곤(BLUE DRAGON) : 트리포의 성우로도 출연
- 모모타로 전철 시리즈(桃太郎電鉄)
- 드래곤볼 온라인(ドラゴンボールオンライン) : 전면 감수
(* 이 글은 제가 모 잡지에 연재했던 글을 수정해서 올린 것입니다.)
[드래곤볼] 연재 당시 비화("사실은 배경 그리기가 귀찮아서 전투 초반에 주변을 박살냈다"라거나) 등도 들어서 관심있었는데, 이제 보니 정말 대단한 노력파였군요. 이미 [드래곤볼] 전에도 탁월한 작가였고... 프랑스 TV 시청률 87.5%도 후덜덜; 정말 대단하네요. .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