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소개/추천
여러분이 보신 작품 중에서 좋은 작품을 소개해 주세요.
장르 | SF, 판타지, 호러, 스릴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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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감독 | 스티븐 킹, 조지 마틴, 올슨 스콧 카드 등 |
나라 | 미국 |
번역자 | 조지훈 |
오, 부디 이 글만은 끝내게 하소서.
그간 다양한 형태의 장르문학 단편선집을 접해봤지만, ‘종말 문학’이라는 타이틀로 한데 엮어 출간한 대담함을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러자니 곧이어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왜 지금 종말 문학인가?>
사실 인류나 문명 종말에 대한 이슈가 지속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요.
그 유명한 2012 멸망설도 있고, 또 지난 주 금요일(21일)은 미국의 헤럴드 캠핑 목사가
두 번째 인류 심판의 날이라며 지목했던 날이기도 했었죠.
캠핑 목사는 구약성서 창세기 노아의 방주에 나오는 대홍수를 다시 분석하면 파괴가 진행된 77일간을
7천년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서
아직은 이렇게 멀쩡하게, 그럭저럭 잘 살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설이나 예언들을 차치하고서도, 종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고 있다는 것은 좀 흥미롭습니다.
그러니까 단순히 이슈가 되는 가설이나 예언에 휘말리는 것이 아니라,
서브장르로서의 번듯한 구심점을 갖추고 있단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관련 작가들이 지난 20년간 발표한 작품들을 엮었다고 하니 말이죠. 그 만큼의 시간을 지나온 내공이 있는 것입니다.
2차 대전 직후 성행하다 주춤했던 종말 문학은 2000년대 들어 등장한 테러 등의 새로운 위협들로 부흥기를 맞았는데,
이 선집은 그런 신흥 부흥기에 진입한 종말 문학의 결을 담아냈다고 해도 좋을 만큼 훌륭한 참여 작가군의 라인업을,
보란듯이 전시하고 있습니다. 선집의 첫 작품을 바로 스티븐 킹이 마크하고 있으니까요.
게다가 조지 마틴, 올슨 스콧 카드 등 그 이름들만으로도 기대감이 충만해지죠.
탁월한 발상으로 이 책을 엮은 존 조지프 애덤스는 《판타지와 SF(F&SF)》 부편집장이자 2011년도 휴고 상과
세계 판타지 상 최고 편집자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었던 저명한 편집자입니다.
그는 <왜 종말 문학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서문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를 이 황량한 풍경, 즉 포스트 아포칼립스 문학으로 이끄는 요인은 무엇일까? 적어도 내게, 그 이유는 분명하다.
종말 문학이 모험에 대한 우리의 기호, 즉 새로운 발견이 가져다주는 전율 및 뉴프런티어에의 갈망을 실현해 주기 때문이다. …
환상을 다루기도 하고, 더 많게는 공포의 영역을 탐구하지만, 그 어느 것이나 우리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던져준다.
<인류가 멸망하면 우리가 아는 세상과 삶은 어떻게 되는거지?>
[*]그대, 아직 이 글을 읽고 있는가? - 스티븐 킹, <폭력의 종말>
앞서 언급했듯, 걸작선집은 스티븐 킹의 단편으로 시작합니다. 선집의 기조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는 첫 작품의 자리는 역시 스티븐 킹.
주인공은 프리랜서 작가인데, 설정된 주인공의 이 직업이 심심치 않은 효과를 내옵니다. 스스로 죽음의 주사를 맞은 주인공은
‘확실한 데드라인’ 속에서 지난날 천재적인 동생과 감행했던 ‘전인류적인 실험’을 회상하며 글을 써나가는데,
다가오는 그 생명의 데드라인이 글 자체에도 반영되어 종말의 과정을 함께 감내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 과정을 스티븐 킹이 어떤 형식으로 표현해냈느냐 하는 것은, 후반부로 갈수록 과감하게 드러납니다.
이 역시 하나의 실험인지도 모르죠. 처음에 어떤 ‘오해’로 여겨질 만한 기민함으로 시작된 기법은,
곧 그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직접 텍스트를 따라가야만 온전히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스티븐 킹이 쓴 <폭력의 종말> 역시 이중의 실험이자 완전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오, 부디 이글만은 끝내게 하소서.”
[*]슬픈 건 질색이지만, 과거 따위는 없었어요 - 올슨 스콧 카드, <고물수집>
걸작선집의 두 번째 작품은 SF 소설계의 거장 올슨 스콧 카드의 <고물수집>입니다. 원 편집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작품은
카드가 자신의 종교(몰몬교 신자로 유명하죠)를 공개적으로 탐구한 최초의 작품이자, 종말 ‘이후의 세계’에 발을 디딘
최초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미래를 위한 비축에 동원되지 않고 유일하게 남은 모터동력기인 ‘트럭’을 이끌고
폐품 수집을 하며 지내는 주인공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거의 간직하고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대신 그 자리에, 골드러시 시절 귀향 몰몬 교도들이 가져온 황금이 잠들어있는 호수의
‘깊고 검은 구멍’에 대한 희망을 배치시켰죠.
세상은 옛날에 죽었다. 따라서 이미 종말이니 중요할 것도 없었다. …
별빛 화려한 회색 화강암 사원에 둘러싸인 깊고 검은 구멍.
목표가 바로 저기서 그를 기다렸다. 미래. 자신과 두 친구를 위한 성공의 기회가.
그 호수에서 주인공이 무엇을 확인했는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허나 주인공은 줄곧 그 땅(또는 그 상태)에
속하려 들거나 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옛날에 죽었고, 그의 도시는 아직 건설되지 않은 미래이기 때문이죠.
엄연한 의미에서의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 즉 종말 ‘이후의 세계’를 주인공이 탐색하고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암시가 종교적으로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그 생각을 연장해보면 더욱 흥미롭게 읽힙니다.
[*]과학을 삼켰으므로, 내가 바로 신이로다 – 파올로 바시갈루피, <모래와 슬래그의 사람들>
걸작선집의 세 번째 작품은 몬태나 구리 광산을 폐쇄하면서 생긴 오염된 연못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한 마리 야생견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주변의 황산과 중금속 오염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던 개라는 ‘실재’와,
먼 미래를 배경으로 거의 인간이랄 수도 없는 존재들을 결합시킨 ‘상상력’의 완전판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우연히 발견한 개를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그 존재를 이해할 수 없는 대상으로 규정하는데
(심지어 전에 동물원에서 개를 본 경험으로 ‘그것이 개가 맞다’고 확신할 정도),
그 이후부터 개는 인간의 ‘진화’ 이전과 이후의 상태를 가늠하는 매개로서 자리하게 됩니다.
진화된 인간들은 모래로 식사를 하고 살갗을 벼리고 칼날을 이식해 온몸을 면도칼처럼 만들기도 하며,
툭하면 손발을 끊어내면서도 그것의 회복에 있어서는 시간에 구애 받는 법이 없습니다.
진화하기 전 우리도 오랫동안 저런 식으로 살았다는 게 믿겨져? 다리를 잘라도 재생되지 않았다는 게?
저 개는 바위만큼이나 약해. 한 번 깨지면 영원히 붙지 않으니까.
그리고 광물 진흙을 먹고살지 않는 그 개를 보며 인간의 원형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요.
현실의 소재였던 개는 과거를 ‘상상하는’ 여과지가 됩니다.
개 때문에 생각이 복잡해. 누군가 과거에서 나와 지금 우리 모습을 본다면 뭐라고 얘기할까?
인간으로 여기기는 할까?
[*]그때 세상을 너도 봤어야 했다 – M. 리케르트, <빵과 폭탄>
걸작선집의 네 번째에 자리하고 있는 이 작품 역시, 현실의 소재에 기반해 작품 속에서 상상력으로 확장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리케르트는 아프가니스탄에 투척되는 식량 꾸러미가 폭탄과 같은 색으로 포장된 탓에 굶주린 아이들이 폭탄을 식량으로 오인해
사망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 단편을 썼다고 하죠. 이처럼 극히 비극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했지만 실은 ‘이전 세상’에 대한 열망과
따뜻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찬란한 빛처럼 세상에 깨어나지만, 스스로의 그림자에 갇힌 채 천천히 어두운 미래를 향해 저물어가는 우리.
<그때 세상을 너도 봤어야 했다.> …
그 시절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난 봄꽃과 아이들 웃음소리, 그리고 종소리와 염소 울음소리를 떠올린다. 연기도.
그리고 지상에서 떨어지는 식량 꾸러미와 폭탄처럼, 세상에 종말을 가져다 준 것은 다름아닌 ‘눈(雪)’으로 변모합니다.
저항할 수 없는 수직낙하의 위력를 대변하게 된 것이 눈이죠. 평화와 기쁨을 상징했던 백설의 눈은 이제,
죽음을 연상하는 존재로서 세상에 작용합니다.
아이들은 이전의 세상을 모르고, 그렇게 되어버린 세상에 대해 아버지는 미안함과 반성을 언뜻언뜻 드러냅니다.
“내 말은…… 너희 아이들…… 여긴 우리가 떠맡긴 세상이잖니. 너희들은 구분도 못하는 악으로 가득 한 세상…….”
종말의 세계를 다루는 작품에서 이런 대사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참 유의미한 일로 다가옵니다.
세대 간의 애틋한 유대가 싹트는 지점이죠.
“상상이 안 가.”
“그래, 그게 요점이니까.”
[*]저들은 인간이다 – 조지 R. R. 마틴, <어둡고 어두운 터널들>
드디어 조지 마틴의 단편! 지상은 이미 지독한 방사능 지옥이지만, 깊은 땅속에는 ‘위대한 전설의 터널’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태고의 터널을 탐사하는 ‘인간의 정찰자’들이 도착합니다. 이윽고 지구탐사대원들은 그 아래에서 발견한
녹슨 철근 기둥을 보더니 원정 최대의 역사적 발견이라며 호들갑을 떠는데, 그 기둥이 바로 “보존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명을 계승한 피플족은 벌레 괴물들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필요한 새로운 ‘관점’과 ‘유전인자’를 제공받기 위해
이 지하세계까지 내려온 것이죠. 피플족은 그들을 마주하기 앞서 많은 기대감을 나타냅니다.
저들은 인간이다. 고대 존재들과 같은 인간이다. … 공포의 시대는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
현자들이 노래하던 과거의 영예가 돌아올 것이다. 라고.
그 다음엔 이처럼 두 개로 분리된 인간의 형태, 즉 신인류와 피플족의 극적인 만남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그 순간의 장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인간이란 어디까지 적응할 수 있나 하는 실험을 시연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죠.
이 극적인 순간의 묘사는, 기꺼이 마틴의 몫으로 맡겨 두는 것이 정당합니다.
[*]침묵의 역병 – 옥타비아 E. 버틀러, <말과 소리>
1984년 휴고 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작가가 버스를 타고 오던 중 목격한 무자비한 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왜 인간종족은 미개인처럼 대화보다 주먹이 앞설까?”에 대한 문제를 고민했다고 하죠.
이 물음에서 시작한 작품답게, 세상은 이미 ‘언어가 일그러진 마당’입니다. 그 주체가 소련으로 언급되는 부분이 미묘하긴 하지만,
갑자기 신종 바이러스와 방사능 같은 위협이 전국을 휩쓸었고 인간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증상은 언어를 잃거나 심각하게 훼손당하는,
회복 불가의 그것이었죠.
주인공 여자가 빼앗긴 건 다름아닌 ‘읽기’와 ‘쓰기’였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울 장애인지 가늠이 되십니까?
기억력마저 훼손되고 “읽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연료로 쓰자니 가슴이 미어질 책들”은 “집 안 가득이었”던 것이죠.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을 앗아가는 질병이라니, 끔찍합니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도 한 줄기 희망은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로 아이들, 침묵의 역병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말예요. 이 아이들은 질병 주기의 소멸이나 어떤 면역성을 상징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자와 아이들은 이제, 말로서의 소통은 가능해진 것이죠.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종말 - 데일 베일리, <우리가 아는 바 그대로의 종말>
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작가는, “세상은 언제나 누군가의 종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이 작품에서 종말의 날은 그렇게 순식간에 다가옵니다. 그리고 막상 ‘그날’이 도래해도, 그것을 감지하기까지는
여러 번의 실제적인 에피소드를 거쳐야만
실감을 하게 되지요. “세상의 종말. 그가 본 거라고는 작동불능의 전화기, 작동불능의 TV, 그리고 작동불능의 인간들 뿐이었다.”
내가 만약 주인공 입장이 되었을 때, 가장 근접한 현실의 시선이 이에 가까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베일리는 아예 대놓고 종말 이야기의 전형이나 종류, 등장하는 인물의 특징에 대해 나열합니다.
또 종말의 이유나 단 몇 사람만이 살아남는 이유에 대한
독자의 호기심에 공감해주기도 하죠. 그러나 그뿐. “개똥 같은 일은 언제든 일어나는 법이다. 어차피 세상의 종말이 아닌가.”
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핵심입니다.
작가는 공룡의 멸종, 서력 79년 폼페이 화산 폭발,
나치의 유태인 학살, 르완다 학살, 1960년 파키스탄 쓰나미와 911테러 등……
종말의 전조와도 같은 인류의 재난들, 즉 종말 이야기의 유형이 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나열하며
가장 실제적인 비극을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말하죠.
그들은 죽었다. 사망. 작동불능. 영원히 지구에서 소멸한 것이다. 철 없는 장난꾸러기 하느님. 악마.
종말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그거다. 나머지는 기껏 잡설일 뿐이다.
+ 이제까지 추려 본 작품들은 걸작선집의 기조를 말할 수 있는 작품들과 더불어 다분히 제 취향 위주로 선택한 부분입니다.
앞서 애덤스가 말했듯 환상에서 공포까지 다루는 이 두 권 안에는 각기 다른 22편의 SF종말 시나리오가 있으니
섣불리 생각하지 않으셔도 충분한 보상을 받으실 수 있을 듯 해요.
어쨌든, 인류의 종말을 다룬 최근 20년간의 대표작들을 다 읽고 나서도 결국 같은 물음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좀 신기한 일입니다. <왜 지금 종말 문학인 걸까?> 그리고 다시 물어도 대답은 시작과 같은 곳에 자리해 있더군요.
종말 문학은 “과거의 빚을 청산하여 새 출발을 가능케 해주며, 또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조금 더 빨리 알았을 경우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어쩌면 그마저 소통의 시작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이야기들을 읽고, 여러분이 직접 결정하라.”
+ 보태기: 함께 읽으면 좋은 종말 문학
코맥 매카시의 <로드>
영화로도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작년에 특별 시사회 때 박찬욱 감독과 함께 봤던 기억이 나네요.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과 더불어 이 작품 이후 다시 종말 문학이 부흥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해버린 세계에서 아들과 아버지가 생존을 위한 처절한 시간을 보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눈 먼 자들의 도시>
역시 영화로 제작된 작품입니다. 원인불명의 실명이 전염병처럼 퍼져 익명의 도시, 익명의 인물들에게 삽시간에 전파되는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불가항력의 재난을 맞은 인간들의 다양한 국면을 훌륭하게 다룬 걸작이죠.
맥스 브룩스 <세계대전Z>
가상의 전염병이 불러온 대재난을 인터뷰라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풀어낸 맥스 브룩스의 대표작입니다.
좀비로 인해 세계가 대공황에 빠진 지 수십 년 후, UN의 조사 위원회를 통해 생존자들을 인터뷰하여
좀비로 뒤덮였던 세계를 현실감 있게 묘사한 작품입니다.
프래드 피트가 출연한 동명 영화가 2012년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얼마 전엔 <세계대전Z> 촬영 도중 무기 실탄 장전으로
SWAT가 출동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고. ;)
J. L. 본 <하루하루가 세상의 종말>
현역 미 해군 장교가 가상의 전염병이 불러온 지구 대재앙의 상황을 일기 형식으로 집필해서 화제가 된 소설이죠.
올해 1권의 후속작도 출간되었습니다. 전작에서 핵폭탄과 괴바이러스로 종말이 시작된 시점에서 생존을 건 사투를 시작합니다.
리처드 매드슨 <나는 전설이다>
지난 50년 동안 공포소설의 베스트셀러 자리를 지켜 온, 말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핵전쟁 이후 변이된 바이러스에 감염된 인류가
모두 흡혈귀가 되고 유일하게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이 홀로 그들과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에서 황량하게 변해버린 세계의 분위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스티븐 킹 <셀>
휴대폰이 정체 모를 전파를 받아 사용자의 뇌를 포맷해 버린다는 설정에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1999년에 치명적인 교통사고를 당한 후로 은퇴까지 고려하던 스티븐 킹이 수년 간의 침묵을 깨고
발표한 작품이라 더 화제가 되었었죠.
네빌 슈트 <해변에서>
엘리엇의 시 <텅 빈 사람들>의 마지막 구절에서 영감을 얻어 핵전쟁 후 방사능에 의해 멸망하는 세계와
최후에 이르는 인류의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대표 종말 문학으로 뽑히는 작품이면서,
코맥 맥카시의 <로드> 등 이후의 종말 문학에도 크나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지요.
― '세상이 이렇게 끝나는구나, 쿵 소리 한 번 없이 흐느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