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게시판
2006년의 오늘 일본의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에서 개발한 적외선 천문위성 ‘아카리’가 발사되었습니다. 조명이나 작은 빛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아카리’는 망원경의 방향을 바꾸면서 하늘을 핥듯이 관측하며 적외선으로 살펴본 우주의 지도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아카리를 통해 우리는 은하의 기원과 진화의 비밀에 대해 조금 더 접근할 수 있었고, 태양계 밖의 행성들을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었지요.
아카리는 우주 저 먼곳의 비밀을 아주 조금이나마 우리에게 더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저 먼 곳 어딘가에는 우리 인간과는 다른 어떤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더하게 해 주었지요.
그런데 정말로 그들이 우리를 찾아온다면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요?
오늘의 추천작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바로 그런 이야기를 다룬 작품입니다.
마크로스는 2009년 02월 22일(바로 3년 전의 오늘) 진수식을 올린 우주 전함의 이름입니다. 1999년 7의 달.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했다는 공포의 대왕 대신에 하늘에서 떨어진 이성인의 전함을 개조하여 완성된 함선이지요.
이 전함의 존재는 인류에게 다른 지적 존재, 그것도 우리 인류보다 훨씬 기술이 발달한 지적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고, 우주를 호기심이 아닌 두려움의 존재로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고자 마크로스와 각종 우주 전함이 건조되었지요.
우주로부터의 침략자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식은 세계 정부의 출현으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이권을 다투는 인간의 통합 정부는 오랜 전쟁 끝에야 실현되었으니까요.
그리고 2009년 2월 22일. 마크로스의 진수식에서 사건을 발생합니다. 마크로스, 정확히는 그들의 적국인 감찰군의 함선을 추적한 이성인 젠트러디의 전함이 지구로 다가온 것입니다. 마크로스는 갑자기 작동하여 주포로 전함들을 날려버립니다. 이는 감찰군이 남겨놓은 부비트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인류가 이성인에게 먼저 선제공격을 한 결과가 된 겁니다.
이렇게 시작된 마크로스의 이야기는 SF와 애니메이션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세계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로보테크’라는 이름으로 -여러 다른 작품과 뒤섞여 괴상하게 재편집되긴 했지만- 호평받았으니까요.
<우주전함 야마토>나 <기동전사 건담>과는 달리 SF와 애니메이션팬들로 구성된 '신세대' 제작진들이 만든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는 SF 만이 아니라 아이돌이나 러브 코미디 같은 당시의 젊은 세대에서 유행하던 문화를 잘 반영한 작품이었습니다. 훗날 가이낙스를 만드는 주역들인 야가마 히로시나 안노 히데아키 등도 대거 참여한 이 작품은, 말하자면 ‘오타쿠 제작진’들이 만든 첫 작품이라고 해도 좋았지요.
자연히 그들 사이에선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만들자.”라는 분위기가 넘쳐났고, 동시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SF로서의 ‘마크로스’는 이성인과의 첫 번째 만남(퍼스트 콘택트)을 다룬 동시에 이를 통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전쟁물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에는 전쟁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삶이 존재한다는 것도 특징이며, 이야기 전반에서 ‘문화’라는 것이 중요시되고 있다는 점도 기존의 우주 전쟁물과는 차별화된 작품이지요.
설정이나 영상 측면에서의 ‘마크로스’는 기존의 로봇 애니메이션과도 다른 측면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무엇보다도 ‘리얼 로봇’이라는 흐름에 충실한 작품이었던 것이지요.
마크로스’는 길이 1.2km의 거대 전함이 로봇으로 변신하여 주먹을 날리는 슈퍼 로봇 같은 측면을 보여주면서도, 그 내면에는 당시로서는 가장 사실적이고 또한 밀리터리적인 메카들을 등장시킨 작품입니다.
리얼로봇의 효시라고도 할만한 <기동전사 건담>이 사람을 거대화시킨 슈퍼로봇이나 강화복의 연장선에 있다면, ‘마크로스’의 병기들은 기존의 전차나 전투기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데스트로이어’라 불리는 지상용 병기들의 디자인은 기존의 일본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는 찾을 수 없는 혁신적이고 참신한 것이었지요.
[ 멕워리어 팬들에겐 '워해머'란 이름으로 친숙한 데스트로이어 토마호크. 지금보아도 매우 참신하고 사실적인 디자인이다. ]
그래서일까요? ‘마크로스’의 메카 디자인은 미국에서도 호평 받아 FASA에서 무단으로 이용해서 자사의 제품인 ‘배틀테크(메크워리어)’에 등장시키기에 이릅니다. 훗날 이 문제로 소송이 제기되었고 결국 FASA와의 사이에 화해가 진행되어 FASA에서 정식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말이죠. (하지만 ‘마크로스’가 아닌 ‘로보테크’의 판권을 가진 골드하베스트의 소송 제기로 ‘메크워리어 5’가 출시되지 못하는 결과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한편으로 ‘마크로스’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미국에 받아들여지는 일련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크로스’는 SF팬이었던 제작진들의 ‘SF적인 리얼 추구’라는 방향성에 의해 탄생한 작품으로서 한편으로 일본에서 SF가 대중화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성인과의 최초의 만남과 교류, 그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새로운 문화나 새로운 세대의 이야기 같은 SF적 소재에 그들이 생각하는 ‘가능한 사실적인 디자인과 기술’을 도입하여 완성된 작품이니까요.
‘초시공요새 마크로스’라는 작품은 기존의 작품에서 일탈한 새로운 흐름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젠트러디들이 지구인의 문화를 접하며 ‘프로트컬쳐’라고 외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지요.
비록 스탭들의 경험 부족이나 제작 단축과 연장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특히 외주 작업의 품질이 매우 나빴다는 점도 겹쳐서), 분명히 일본의 애니메이션 역사, 그리고 SF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일 것입니다. 작품으로서의 특성이나 이 작품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가지 작품의 존재, 그리고 이를 통해 탄생한 새로운 제작자들의 존재를 생각해 보아도...
그런 점에서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말고에 관계없이 한번 쯤 꼭 볼만한 작품입니다. 비록 80년대의 작화, 게다가 중간 중간의 외주 작업이 지금 보기에 아쉬울지도 모르겠지만...
참고로 '마크로스'는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라는 제목의 극장판으로도 유명한데, 우선은 TV판의 이야기를 먼저 보시는 것을 권합니다. 여러가지 주제나 내용 면에서 극장판보다 TV판 쪽이 좀 더 충실하기 때문이죠. (극장판이 작화나 애니메이션으로서의 겉보기에 훨씬 좋다는 점도 있고요.^^)
여담) 개인적으로 ‘마크로스’의 이야기에서 특히 좋았던 것은 첫 번째 접촉에서 ‘문화’라는 이질적인 존재에 굴복했던 이성인들이 다시금 반란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나는 아군을 죽이는 캠진’이라며 지구 측을 도왔던 캠진이 반란의 주역으로 그는 동료와 입맞춤을 하며 ‘문화란 고작 이런거’라고 얘기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었지요.
원문링크 : 표도기의 우주의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