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원폭의 아버지’이자 ‘비운의 학자’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사망한 날입니다.
  물리학계에서 국제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맨해튼 계획을 주도하여 뛰어난 지도력으로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원폭 개발을 성공시킨 인물이지만, 그가 ‘비운의 학자’라고 불리는 것은, 그 자신이 원폭 개발을 매우 후회하며 여생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가 원폭을 만든 것은 그것으로 전쟁을 마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가 바란 것은 이 지나치게 강력해서 아예 쓰지 못할만한 무기를 통해서 ‘전쟁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의 생각은 정치가와 군인 앞에서 매우 순진한 이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원자폭탄은 결국 사용되었고, 이후 그 위력에 놀란 이들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 도리어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사용하려 합니다.
  결국 오펜하이머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후회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만년에는 고대 인도의 신화에 빠져들어 “나는 사진이며, 세계의 파괴자.”라는 부분을 인용하여 자신을 비유하기도 했지요.

  그런 그의 이야기를 통해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립니다.

  바로 스탠리 큐브릭의 미래 3부작 중 하나인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Dr. Strangelove or: How I Learned to Stop Worrying and Love the Bomb)”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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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또는 어떻게 내가 걱정을 그만두고 폭탄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알려주지.”. 제목만으로도 이 작품이 굉장히 괴상하다는 것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풍자성 넘치는 작품이죠.


  영화는 과대망상증에 빠진 미국의 한 공군장군이 소련에 대한 선제 핵 공격을 명령하면서 시작됩니다. 미국 대통령은 이에 대해 참모회의를 열고 이야기를 나눌 뿐만 아니라 소련에도 연락을 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소련이 핵공격을 받는 즉시 전세계를 방사능으로 오염시키게 하는 “운명의 날 장치”를 만들어두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미국 대통령은 소련의 서기장에게 전화를 하여 보복을 하지 말도록 요청하고 폭격기를 격추할 수 있는 정보를 줍니다.

  이 작품은 개그라기보다는 블랙 유머 작품이라고 하겠습니다. 엄청나게 웃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쓴 웃음을 그칠 수 없는 작품이지요. 무엇보다도 이 작품은 냉전이라는 체제의 문제점과 정치가들의 비뚫어진 모습을 잘 보여주면서 우리의 미래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만들어 줍니다.
  미국 대통령과 소련 서기장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대화나 종말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미국보다 소련이 더 많은 방사능 셸터를 지을 것을 염려하는 장군의 모습 등에서 말이죠.

  지금으로부터 50여 년 전인 1964년에 만든 작품이지만, 수많은 이들이 ‘위대한 영화’로 평가했을 만큼 지금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미국 영화 협회의 100대 영화 중 26위로 올라있기도 하지만, 100대 웃음에 3위로 올라가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블랙 유머’일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우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품은 결국 진지하게 우리네 미래를 걱정하게 만드니까요. (영화 속 인물들이 실제의 정치가나 군인들에 비해 과장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주변에 눈을 돌려보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배우인 피터 셀러스가 대통령과 영국군의 맨드레이크 대령, 그리고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 역을 맡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또 하나의 작품을 추천해 봅니다. 역시 피터 셀러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 “으르렁거린 생쥐(The Mouse That Roared)”이지요.

  레너드 위벌리의 소설 “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를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피터 셀러스는 역시 1인 3역(그것도 한 명은 여자역)을 맡아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이전에 만든 블로그에서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http://blog.naver.com/pyodogi/110072139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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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거의 중세 시대의 기술 수준을 갖고 수출품이라곤 와인 하나가 전부인 초소국 드랜드 펜윅을 주역으로 한 풍자극입니다. 미국의 유사품 와인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진 그랜드 펜윅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구식 나무배에 병사를 실어 미국으로 보내죠.
  그런데 마침 미국은 공습훈련으로 모두 지하로 대피했던 중이었고 텅빈 도시를 ‘점령’한 그랜드 펜윅 군은 우연히 궁극적인 병기 쿼디움 폭탄의 개발자인 코킨스 박사를 납치합니다. 이로써 그랜드 펜윅은 미국에게 승리했으며, 쿼디움 폭탄의 위협을 앞세워 약소국가 연합을 구성하여 ‘세계 평화’를 위한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릅니다.

  이는 어떤 점에서 오펜하이머가 바랬던 그런 미래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천재이긴 했어도 정치인들의 마음을 읽기엔 순진했던 오펜하이머의 생각과 달리 세계의 운명은 “으르렁거린 생쥐”보다는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가까운 느낌이 드는 걸 부정할 수 없죠.

  물론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론 큰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채 수많은 핵전쟁의 위기를 넘어서 현재까지 인류가 역사가 이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두 작품을 서로 비교해 보면서, 우리의 미래가 어떤지 한번 생각해 보시길 권합니다.




여담) “약소국 그랜드펜윅” 시리즈는 뜨인돌 출판사에서 총 4권이 나왔습니다. 모두 상당히 재미있는 풍자이고 웃음을 주지만 한편으로 상당히 씁쓸하게 만드는 블랙 유머 작품이기도 합니다. 아직 보지 못하신 분들이라면 한번 쯤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