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이 하나의 연방으로 느슨하게 통일된 가상의 근미래. 북측 정보조직의 현장요원인 '나'는 오랜만의 휴가를 맞아 체코를 여행 중에 기묘한 지령을 받는다. 어떤 극장을 찾아가서 공연 중인 연극을 관람한 뒤 무대 위에서 뭘 봤는지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연극을 보던 도중에 시체 역할로 출연하여 가만히 누워있는 한 인물을 발견하고 놀란다.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난 연방 유력자 장무권의 숨겨둔 딸이자 '나'의 영재학교 시절 동기인 김은경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감시 임무가 아니라 연방의 권력투쟁과 관련된 중대 사안임을 직감한 '나'는 조직을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조사를 시작한다. 자기 힘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낀 '나'는 한때 유능한 정보분석가로 이름을 날렸으나 현재는 조직을 이탈하여 생사불명 상태인 옛친구 조은수를 불러내기로 한다. 하지만 조직에서도 이미 '나'의 배신을 눈치채고 함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타워>, <신의 궤도>에 이은 배명훈의 3번째 장편소설로, 연작 소설집이 아닌 전작장편으로는 2번째에 해당한다. 차갑고 황량한 체코의 겨울을 배경으로 숨가쁘게 쫓고 쫓기는 남자들의 모습을 그리는 첩보 스릴러이지만, 뒤로 갈수록 장무권이 생전에 준비한 비밀병기의 존재가 부각되면서 SF로서의 색채도 짙어지며, 그와 동시에 혼란스러운 주변 세계와 직면하여 자기 자신의 갈 길을 찾아야만 하는 주인공의 자아탐색을 묘사하는 심리소설의 측면도 은근슬쩍 드러내는 복합 장르의 작품이다. 모든 것이 어지럽게 뒤섞인 회색 세상에 던져진 주인공이 끝없이 남을 의심하고 자기를 감추며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는 과정이 숨막힐 정도로 집요하게 그려지며, 그 와중에 조금씩 드러나는 전략무기 '악마'의 실체가 불가사의한 경외감과 호기심을 돋우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주인공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맺어진 조은수나 김은경과의 과거나 현재가 흥미진진한 퍼즐 맞추기처럼 이어지면서 우정과 모략, 협력과 배신이 이리 뒤집히고 저리 뒤집히며 주인공의 운명을 바꿔 나가는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로 이어지게 된다.

 

******작품의 내용에 대한 천기누설이 있습니다.******

이 작가의 단골 캐릭터이자 전작 <신의 궤도>에서는 주인공을 맡아 열연했던 은경이가 여기서는 정반대의 입장으로 등장하여 극 전체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출연하는 장면은 몇 군데 안 되고 대사도 거의 회상장면에서만 나오는지라 겉보기엔 별 비중이 없는 우정출연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마치 <시민 케인>의 오손 웰스처럼 내러티브의 뒤편에서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특이한 배역이라서 실제 비중은 훨씬 크다. 극중에서 보여주는 모습 또한 단편적이긴 하지만 모두가 동경하는 마돈나, 털털하고 수더분한 동급생, 적에게 쫓기는 연약한 도망자, 모든 인고를 참아내며 반격을 준비하는 팜므 파탈 등등 굉장히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고 있어서 이제까지 은경이가 연기한 배역들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배역이라 하겠다. 물론 이러한 역할들은 직접 독자에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사태를 지켜보는 주인공의 눈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눈에 확 띄는 것은 아니지만 이야기의 진행과 긴밀하게 관련을 맺고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드러나므로 제법 설득력이 있다.

극중에 등장하는 가제트들도 어색함이 없이 딱 적절한 부분에서 이야기를 움직이기 위해 깔끔하게 활용된다. 인간의 잠재의식 속에 숨어있는 공격본능과 어딘가에 숨겨진 인공지능 네트웍을 융합하여 연방 전체의 전산망을 장악, 적이 눈치채기도 전에 목표를 공략해버리는 금단의 전략병기 '악마'를 비롯하여, 다양한 용도로 개발되어 어디든지 파고 들어가 임무를 수행하는 곤충형 초소형 비행체, 대상자의 취향과 행동 패턴을 빅데이터로 조합한 뒤 타인의 패턴과 비교함으로써 그 인물의 행동을 예측하고 감시하는 추적 시스템, 그 시스템의 허점을 역이용하여 거짓 데이터를 사방에 흩뿌림으로써 진짜를 찾을 수 없게 하는 디코이 프로그램 등 한때 첩보물에 환장한 독자라면 흥미를 느끼지 않고는 못배길 아이디어가 연속으로 튀어나온다.

물론 이러한 장치들은 이야기를 진행시키기 위한 윤활제에 불과하며 결국 작가가 하려는 이야기는 주인공과 두 친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인간 마음의 복잡한 변화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은경이-주인공-조은수-조직의 순서로 이어지는 기기묘묘한 인력(引力)의 구도가 계속해서 강조되는 게 재미있다. 그때그때의 이야기 전개나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따라 특정 사물의 색깔(흑 또는 백)이나 지면의 각도(0도에서 180도)가 끊임없이 변화되는 것도 텍스트로 이루어진 문학만이 선사할 수 있는 색다른 느낌을 준다. 천신만고 끝에 주인공은 결국 다른 누군가의 깃발을 쳐들고 앞으로 돌격하는 '기수'의 처지에서 서서히 벗어나 조직은 물론 은경이로부터도 해방되어 스스로의 길을 걷게 된다. 이러한 결말에 주목한다면 이 작품은 은닉되어 있던 진실, 은닉되어 있던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발견하여 사랑도 미움도 다 뛰어넘은 '삶'을 손에 넣는 해탈의 드라마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ps1. 영화로 찍는다면 추격 장면은 크리스토퍼 놀란, 대화 장면은 박찬욱이나 봉준호, 은경이의 공연 장면은 대런 애로노프스키에게 맡기면 딱일 듯. (꿈이 너무 크잖아! OTL)

ps2. 킬러 혹은 첩보원이 주인공으로 나와서 은경이와 얽히고 스스로의 처지를 변화시키는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단편 <얼굴이 커졌다>나 <세번째 계단>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다만 각각 플롯의 전개나 결말 처리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시간 나시는 분은 요모조모 비교하며 읽어 보시길.

ps3. 각각의 인물이 저마다 상대에게 디코이인 동시에 진품이기도 하다는 들쑥날쑥한 관계변화가 재미난다. 이것은 독자와 작품의 관계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나는데 예를 들면 대부분의 독자들은 주인공과 은경이의 러브스토리를 기대하며 책을 펼쳐들지만 사실 그건 디코이일 뿐이고 실제는 (이하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