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에 보도 기사 중에서 공지에 등록하지 않은 것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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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9일, 서울 사당동에 위치한 다가구 주택 지하에 키 190㎝가 넘는 거구의 낯선 외국인이 들어섰다. ‘SF&판타지 도서관’ 푯말이 붙은 회색 대문이 그의 몸집보다 작았다. 야로슬라프 올샤(47) 주한 체코 대사였다.

SF&판타지 도서관은 2009년 3월 개관했다. 일반 도서관에서 구하기 힘든 SF(공상 과학 소설) 서적을 대중과 공유하고자 SF 마니아 겸 게임 시나리오 작가인 전홍식씨(36)가 팔소매를 걷었다. 전씨가 소장한 책 7000여 권 외에 SF 전문 출판사 황금가지가 기증한 책 300여 권이 모이면서 도서관이 갖춰졌다.

올샤 대사가 이날 SF&판타지 도서관을 찾은 것은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야나 레치코바 외 지음·김창규 외 옮김)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이 책은 올샤 대사가 직접 선정하고 해설을 맡아 펴낸 ‘체코 3부작’ 중 세 번째 작품이다. 수도 프라하를 배경으로 카프카와 얀 네루다 등 작가 14명이 쓴 소설을 모은 <프라하>와 체코 대표작 19편을 묶은 <체코 단편소설 걸작선>이 지난 3월과 7월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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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우혜
야로슬라프 올샤 주한 체코 대사(위)는 한국 SF 소설의 척박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체코 3부작’을 구상한 것은 올샤 대사가 한국에 부임한 2008년 9월. 출판사 대표와 번역자·작가를 불러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체코 문학을 알리는 작품집을 만들어보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처음 나왔다. 카프카·얀 네루다·쿤데라 등 그간 한국에 알려진 체코 작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체코 문학의 매력을 제대로 전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중에서도 올샤 대사가 꼭 알리고 싶었던 것이 체코 SF 소설이었다. 체코야말로 SF 소설 강국이라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체코는 로봇(robot)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낼 만큼 SF에 대한 관심이 높다. 1920년 <로섬의 인조인간>이라는 작품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개발된 로보타(robota)가 인간에게 대항한다는 상상력이 처음 싹튼 곳도 체코이다. 그 뒤 체코는 SF 장르를 중심 문학으로 끌어올린 대표 국가가 됐다. 현재 체코에서 활동 중인 SF 클럽은 약 30개. SF 잡지도 월 2만 부가량 판매된다. 인구 5000만명인 한국에서 유일한 SF 잡지 <미래경>이 500권도 팔리지 않은 것과는 대조적이다(체코 인구는 약 1000만명이다).


공산주의 환경이 SF 소설 만개시켜

올샤 대사는 공산주의 치하의 독특한 환경도 SF 소설을 만개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1989년 공산 정권이 무너지기 전까지 완전고용 상태에 있던 체코 국민은 낮에는 정부가 원하는 일을 하고 밤에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했다. 그 결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이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만의 경험과 사고방식을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설득력 있고 수준 높은 SF 소설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실제로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에 작품이 수록된 작가들을 보면 건축가·그래픽 디자이너·정신의학자·미생물학자·물리학자 등 직업군이 다양하다.

올샤 대사 자신도 SF 마니아다. “저는 여덟 살이 되던 때 처음 SF 소설을 접했어요. 미지의 세계를 상상하고 수수께끼를 찾아가는 과정을 좋아했습니다.” 고고학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죽어 있는 행성에 주인공이 찾아가는 SF 소설을 특히 즐겨 읽었다. 

막 20대가 되던 1980년대 중반, 그는 체코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SF 클럽 ‘스펙트라’의 회장이 되었다. 체코 최초의 SF 월간지 <이카리에> 창간에도 간여했다. 이 잡지는 체코 SF 클럽이 수여하는 ‘체코 최고의 팬진(Fanzine)’으로 꼽혔고, 유럽 SF협회가 뽑은 ‘유럽 최고의 팬진’에도 선정되었다고 한다.

외교부에 들어간 1992년 이래 그는 본격적으로 세계 각지의 SF 소설을 수집해왔다. “특히 영미권이 아닌 지역의 소설을 수집하려 애썼다. 미국과 영국의 SF는 너무 흔한 반면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에는 SF 소설이 한 권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나라든 서사 구조가 미국 영웅주의를 닮은 게 많아서 늘 아쉬웠다.”

한국에 부임하기 전 그는 한국 SF 소설을 한 권도 읽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영어로 번역된 책이 한 권도 없어서였다. 북한에서 SF 소설 두 권이 영어로 번역됐다는 정보를 얻고, 평양에서 한 권을 수집한 일이 있었다. 그는 “솔직히 재미는 없었지만, SF 소설 번역본이 북한에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라고 말했다. “일본은 SF 소설 번역본이 너무 많아서 수집을 포기해야 할 정도였다”라고 말하는 그는 한국의 척박한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해 출간된 장르 소설 2000여 권 가운데 SF 소설은 20여 권에 불과했다고 들었다. 소설이 어려우면 영화로 먼저 SF물과 가까워지는 방법도 있는데 아쉽다. 그런데 한국산 SF 영화 <디워>를 봤지만 흥미롭진 않았다.(웃음)”

이날 SF&판타지 도서관에 모인 한국 독자 20여 명 앞에 선 올샤 대사는 “SF 마니아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즉시 마음이 통합니다. 모두 순식간에 친구가 되지요”라고 첫인사를 건넸다. 한국 SF 마니아들이 환호했다.

이번 체코 SF 걸작선의 표제작 <제대로 된 시체답게 행동해!>는 ‘시체’ 퇴마사를 소재로 한  SF이다. 밤마다 유령이 나타나자 집주인이 퇴마사를 불렀는데, 알고 보니 유령을 물리치기 위해 나타난 중년 남성과 20대 청년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존재였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을 쓴 야나 레치코바는 신경과 의사로, 전문 분야인 의학 지식을 활용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물질을 개발하고 주입한다는 내용을 SF 소설에 적용했다.

이번 책의 공동 편집자인 서울 SF아카이브 박상준 대표는 “체코는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카프카와 쿤데라를 낳은 전통적 문화 강국이다. 이번에 소개되는 작품들을 통해 체코 SF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올샤 대사는 “유럽을 여행하는 한국인에게 프라하가 인기 있는 관광지로 꼽히는 것을 안다. 프라하뿐 아니라 체코 문학에도 한국인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